고려 및 조선시대의 우리 조상님들이 가장 중요시 여긴 것이 충효(忠孝)의 마음가짐을 최고의 정신으로 삼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12세손이신 성함은 수형(秀亨)이요 호는 도촌(桃村)으로 약관(弱冠) 17세(歲)때 평서서령(平市署令;평시서의 우두머리)으로 출사(出仕)하여 벼슬이 음보(蔭補)로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으나 숙부인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임금에게 왕위를 강권으로 양위받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을 때 나이 21세였다고 합니다.
도촌(桃村)할아버지가 어릴때부터 수양대군과 교분(交分)이 두터웠던 사이라 왕위를 이어받은 세조임금이 여러번 선물도 하사(下賜)하고 어떻게 하든 관직에 기용(起用)하려 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굳은 절의(節義)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면서 공북헌(拱北軒)을 세우고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寧越>을 향하여 팔장을 끼고 엎드려 충거애국(忠居愛國)하다가 단종임금님이 승하함에 따라 성복애모(成服哀慕)하셨다고 기록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촌할아버지의 충효정신을 뜻있는 많은 분들의 표상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김무영님이 말씀하신 "도촌선생이 예안김문인 문절공(金淡)의 장녀와 혼인함으로써 두집안의 관계는 친밀하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두 집안간에 많은 혼인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두 집안관계가 보통관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말씀이였습니다. 저도 그 점에 있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얼마전 10월 말경 도촌(桃村)할아버지의 후손으로 16세손이신 성함은 여빈이요, 호(號)는 취사(炊沙)인 집안의 중시조에 해당하는 할아버지 묘사에 참석하기 위해 영주시 부석면 감곡에 다녀온적이 있습니다. 취사공할아버지 묘소앞의 상석과 일대기를 적은 비석에 보니 부인(配)으로 [숙부인((淑婦人) 선성(宣城)김씨] 그리고 또 한 곳에는 [예안(禮安)김씨]로 소개되고 있더군요. 그 당시엔 예안(禮安)김문이 어떤 집안인지 무척 궁금해지더군요.
우계이씨 30세손 仁壽 ================================ ┼ ▨ 도촌선생과 예안김문 - 김무영 ┼ │ 도촌선생이 예안김문인 문절공(金淡)의 장녀와 혼인함으로써 두집안의 관계는 │ 친밀하게 되었습니다.이후로 두집안은 그 어느집안보다도 많이 혼인하게 되었으며 │ 심지어는 형제또는 자매모두가 서로의 집안과 혼인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 특이할점은 혼인을 하게되면 혼인한 사람의 가계를 족보에 올릴때는 4대까지 │ 올리는 것이 관례였으나 예안김문의 족보에는 도촌선생의 후손일경우 李秀亨后임을 ┼ 반드시 표기한걸로 보아 두 집안의 관계가 어느정도였는지 알수가 있을것 같습니다. ┼